문승근 ‘무제’ 1978년, 종이에 수채물감, 52 x 76.7cm, 조카 후지노 세이지(藤野清治) 기증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1960년대 일본 미술계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어느 때보다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이어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와 도쿄 비엔날레 등 굵직한 국제행사가 잇따랐다. 전후 일본은 급격한 경제성장과 고도 산업화를 이뤘지만 미술계에서는 오히려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반(反)예술과 전위예술이 거세게 일었다.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을 거부하는 움직임도 두드러졌다. 작가들은 미술관을 벗어나 도시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며 파격과 전위의 태도를 드러냈다. 1950년대 후반 등장한 구타이(具體) 그룹이 중심에 있었고 그 정신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인간의 신체 행위를 바탕으로 물감과 일상용품, 흙, 물, 돌 등 다양한 물질을 다루는 태도는 전후 일본 전위미술의 한 축을 이뤘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서구 미니멀리즘에 대응해 동아시아적 자연관과 철학을 결합한 모노하가 등장했다. 작가들은 돌과 철판, 나무, 흙처럼 가공되지 않은 재료를 최소한으로 손질해 공간에 놓았다. 중력과 시간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이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져온 사물의 과잉에 대한 반성이었다. 동시에 인간이 주변 환경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되돌아보게 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계 작가로는 이우환, 곽인식, 곽덕준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작가가 있었다. 문승근(文承根·일본명 후지노 노보루·藤野登)이다. 1947년 일본에서 태어나 34세에 요절한 재일교포 2세 작가다. 한국 미술계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전위미술의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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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은 국제 현대미술의 흐름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문승근과 같은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미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작업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1960년대부터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예술가로서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판화와 유화, 수채화, 입체, 설치, 비디오 등 여러 매체를 넘나들며 실험적이고 비평적인 작업을 이어갔다. 여기에는 구타이의 영향도 있었다.
문승근 ‘무제(회)’ 1981년, 종이에 스크린프린트, 69.5 x 99cm, 조카 후지노 세이지 기증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문승근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신장병을 앓았다. 평생 병마와 싸워야 했다. 미술도 독학으로 시작했다. 그런 조건은 오히려 그를 더욱 치열하게 작업으로 몰아갔다. 1968년 개인전을 연 뒤 제21회 구타이전에 출품했고, 1969년 제5회 국제청년미술가전에서는 미술출판상을 받았다. 당시 대상은 이우환이 차지했다. 문승근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표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갔다.
활동 초기에는 재일교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1971년부터 한국 이름 ‘문승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낸 1950~60년대, 재일교포들은 어느 한 나라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으로 성장해야 했다. 1960년대 후반 청년이 된 이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문승근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 ‘파친코’에 등장했을 법한 한 청년이 실제로 그 시대를 살고 있었던 셈이다.
1978년 어느 날 문승근은 이우환에게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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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환은 1984년 추도전 회고 글에서 당시를 이렇게 되돌아봤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함의 괴로움을 아는 남자, 언제나 무엇인가 아픔을 계속 품고, 제작에 도전하고 있던 친구, 그것이 문승근이었다.” 문승근 자신도 1978년 다른 인터뷰에서 “현실의 자기 존재를 떠난 예술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존재와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은 그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무제’는 이 무렵 제작된 작품이다. 화면은 연한 노란색에서 짙은 갈색으로 내려가며 .차 색이 깊어진다. 그 위를 짙은 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가른다. 위에서 아래까지 같은 규칙이 반복돼 언뜻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복 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다. 작가의 행위가 축적될수록 화면 역시 서서히 달라진다.
이 작품은 왁스로 염료가 스며드는 것을 막는 일본의 전통 로케쓰 염색 기법에서 영감을 얻은 수채화다. 색을 거듭 덧칠해 투명한 층을 쌓았다. 이처럼 투명감 있는 반복적 붓질은 문승근의 판화와 수채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가족의 생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부모는 직물을 판매하거나 방직공장에서 일했다. 직조에서 비롯된 색과 재질의 감각이 작품에 스며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77년 제1회 현대일본판화대상전에서 수상한 판화도 인화지 위에 현상액을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염직에서 받은 영향이 장르를 넘어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했다고 볼 수 있다.
문승근 ‘무제(황)’ 1981년, 종이에 스크린프린트, 69.5 x 99cm, 조카 후지노 세이지 기증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1980년대 들어서는 한 층의 색을 바른 뒤 그 위에 다른 색을 칠하는 방식을 거듭 사용했다. 위에서 아래로 같은 행위가 이어지지만 화면은 조금씩 달라진다. 재료가 무엇이든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을 찍고 선을 긋고 무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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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직조하듯 일정한 결을 쌓았다. 화면의 상하좌우 어디에서도 시작과 끝을 분명히 찾기 어려운 붓질은 화면 너머로 이어지는 시공간과 사유의 무한성을 떠올리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무제(회)’, ‘무제(황)’은 종이에 질감 처리를 한 뒤 그 위에 물감으로 판화를 찍어 물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문승근의 작업을 관통하는 제작 방식은 붓질의 반복과 집적이다. 같은 행위를 거듭하면서 화면에 흔적을 쌓았다. 이는 재일교포 2세라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붙잡기 위한 일종의 실존적 방어기제이자 자기 확인의 과정으로도 읽힌다. 화면에 남은 무수한 흔적은 육체적·심적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치열한 기록이었다.
건강은 계속 나빠졌지만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차 작품을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1982년 한국에서는 재외작가로, 일본에서는 한국 대표작가로 전시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지병으로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작품 가운데 3.은 그해 조카 후지노 세이지가 기증한 것이다.
작가는 요절했지만 작품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됐다. 2007년 일본 치바시미술관에서는 야기 타다시(八木正·Yagi Tadashi)와의 2인전이 열렸다. 두 작가의 작품을 통해 1970~80년대 일본 현대미술의 실험성과 전위미술의 비판 의식을 입체적으로 살펴본 전시였다. 문승근 역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로서 다시 조명됐다. 2014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 ‘문승근-무한의 시’가 열렸다. 재일교포 사업가 하정웅이 기증한 작품 가운데 문승근의 작품을 선별해 소개한 전시로, 국내 미술계에 그의 존재를 다시 각인시켰다. 현재 그의 작품은 교토국립근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오사카국립국제미술관, 치바시미술관 등 일본 주요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자료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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